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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 이야기

푸스카스 페렌츠(Puskás Ferenc) 역사를 바꾼 선수

by WILDCATS 2023. 9. 21.

푸스카스 페렌츠(Puskás Ferenc)는 헝가리의 전설적인 축구선수이자 감독입니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였으며, 1993년에는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팀을 이끌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 CF(Real Madrid Club de Fútbol)의 전설적인 선수 입니다. 1950년대 초중반, 푸스카스 페렌츠는 전설적인 팀 '매직 마자르'(1952 헬싱키 올림픽부터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까지 무패를 기록했던 축구 역사상 최고라고 부르는 헝가리 대표팀을 지칭하는 말)의 주장으로 전 세계에 위세를 떨치게됩니다.

 

헝가리 대표팀에서는 84경기를 뛰며 83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헝가리 대표팀 최다 득점 기록입니다. 2003년 UEFA 주빌리어워드(UEFA Jubilee Awards)에서는 헝가리 역대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을 만큼, 그는 헝가리를 넘어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전드 중 한 명으로 불립니다. 푸스카스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혼베드 FC(Budapest Honvéd Football Club)에서 자신의 최전성기를 보냈으며, 레알 마드리드 CF(Real Madrid Club de Fútbol)에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축구 역사상 최다 득점 6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부다페스트 혼베드 FC

1927년 4월 1일, 푸스카스의 본명은 푸르첼드 페렌츠(Purczeld Ferenc)였는데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교외인 키슈페스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재봉사였으며, 아버지는 키슈페스트 AC(Kispest AC)의 코치였습니다. 푸르첼드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축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아버지가 코치로 있던 키슈페스트 AC의 유소년 팀에 입단하여 축구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푸스카스 페렌츠로 바꾸었습니다. 또한, 12살이 되던 해에는 출전 연령 제한 규칙을 우회하기 위해 미콜라스 코바트라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키슈페스트 AC와 프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푸스카스는 1943년 11월 나기바라드 AC와의 경기에서 키슈페스트 소속으로 프로 데뷔전을 치룹니다. 1949년, 키슈페스트 AC는 헝가리 국방부에 인수되어 헝가리 육군 산하팀이 이전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팀 이름은 부다페스트 혼베드 FC로 변경되었고, 선수들은 군 계급을 부여받았습니다. 푸스카스는 소령 계급을 받았고, 이는 그의 별명인 '질주하는 소령'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부다페스트 혼베드는 군대 클럽으로서 징집을 통해 졸탄 치보르(Czibor Zoltán), 산도르 코츠시스(Kocsis Sándor)와 같은 헝가리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했습니다. 이로 인해 푸스카스를 비롯한 졸탄 치보르, 산도르 코츠시스 등 당시 무적을 자랑했던 매직 마자르라 불리는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들이 부다페스트 혼베드에 모이게 되었고, 부다페스트 혼베드는 헝가리 리그에서 5번이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푸스카스는 부다페스트에서 뛰는 동안 헝가리 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으며 리그 득점왕을 4번이나 차지했습니다. 1947-48시즌에는 50골, 1949-50시즌에는 31골, 1950년에는 25골, 그리고 1953년에는 27골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1948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한 선수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1956년, 부다페스트 혼베드는 유로피언 컵에서 아틀레틱 빌바오(Athletic Club)와 맞붙었습니다. 원정에서 2-3으로 패한 부다페스트 혼베드는 홈에서 승리해야만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차전이 열리기 전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소련군은 헝가리 시민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선수들은 공산주의 체제에 반대하여 헝가리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결국, 부다페스트 혼베드는 벨기에 브뤼셀의 헤이젤 경기장에서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2차전을 치렀습니다. 푸스카스의 득점으로 3-3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합계 스코어 6-5로 아틀레틱 빌바오에 패배하여 탈락했습니다. 선수들은 헝가리 상황으로 인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제대로 경기를 치루기가 힘들었다고 생각됩니다.

 

헝가리 혁명으로 인해 헝가리로 돌아가지 않게 된 선수들은 부다페스트에 있는 가족들을 불러모았습니다. FIFA와 헝가리 축구 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브라질을 순회하는 모금 투어를 조직했습니다. 투어를 마치고 유럽에 돌아온 선수들은 뿔뿔이 헤어지게 되는데, 요제프 보직(Bozsik József)을 포함한 일부 선수들은 헝가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고, 푸스카스, 치보르, 코츠시스를 포함한 일부는 서유럽에서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푸스카스는 1981년까지도 헝가리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헝가리 혁명으로 인해 헝가리로 돌아가지 않게 된 푸스카스는 AC 밀란(Associazione Calcio Milan S.p.A)과 유벤투스(Juventus Football Club S.p.A.)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푸스카스는 원소속 팀인 부다페스트 콘베드로 돌아가기를 거부하여 UEFA로부터 2년 동안 출전 정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푸스카스는 오스트리아에서 2년 동안 뛰다가 이탈리아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출전 정지가 만료된 후에 이탈리아에서 뛰고 싶었지만, 당시 이탈리아 감독들은 그의 나이와 체중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을 영입할 세리에 A 팀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1958년 뮌헨 비행기 참사로 인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Manchester United Football Club)는 선수단을 보강하기 위해 푸스카스 영입을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한 FA 규정과 푸스카스의 미숙한 영어로 인해 계약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 감독인 지미 머피(James Patrick Murphy) 코치는 푸스카스 영입에 적극적이었기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 CF

몇 달 후, 푸스카스는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스페인으로 이주하여 자신의 두 번째 축구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시즌인 1958년 9월 21일, 푸스카스는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서 스포르팅 히혼(Real Sporting de Gijón, S.A.D.)과의 경기에서 자신의 첫 번째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총 네 번의 해트트릭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1959년 1월 4일 UD 라스 팔마스(Unión Deportiva Las Palmas, S.A.D.)와의 경기에서는 푸스카스와 디 스테파노라는 두 선수가 함께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결국 10:1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를 통해 푸스카스는 자신의 활약과 공격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1959-60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유럽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푸스카스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Club Atlético de Madrid, S.A.D.)와의 준결승전에서 득점하며 결승 진출을 공언했지만, 부상으로 결승전에 출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도 푸스카스는 팀의 첫번째 유럽컵 우승에 기여 했습니다. 다음 시즌, 푸스카스는 유럽컵에서 더욱 더 맹활약 합니다. 요네스 에슈(Jeunesse Esch)와 FC 바르셀로나(Fútbol Club Barcelona)와의 준결승전에서 모두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결승전에서는 푸스카스가 4골, 디 스테파노(Alfredo Di Stéfano)가 3골을 터뜨리며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Eintracht Frankfurt e.V.)를 7-3으로 완파했습니다. 푸스카스는 유럽컵 2연패를 달성하며 전설적인 선수로 우뚝 서게 됩니다.

 

1960-61시즌, 푸스카스는 엘체 CF(Elche Club de Fútbol, S.A.D.)와의 경기에서 4골, 다음 시즌에는 5골을 기록했습니다. 1963년에는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2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는데, 베르나베우와 캄 노우에서 각각 1번씩 기록했습니다.

1961-62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코파 델 레이(Campeonato de España)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결승전에서 세비야 FC(Sevilla Fútbol Club S.A.D.)를 2:1로 이겼는데, 푸스카스가 2골을 기록했습니다. 유로피안 컵 결승전에서 푸스카스는 SL 벤피카(Sport Lisboa e Benfica)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지만, 벤피카의 신성 에우제비우(Eusébio da Silva Ferreira)가 2분 만에 2골을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는 5:3으로 패배하고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1965-66시즌, 푸스카스는 페예노르트와(Feyenoord Rotterdam)의 2경기에서 5골을 기록하며 유로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팀은 파르티잔 베오그라드(FK Partizan)와의 결승전에서 승리했지만, 아쉽게도 푸스카스는 이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보낸 8시즌 동안, 푸스카스는 라리가 180경기에 출전하여 156골을 기록했습니다. 라리가에서의 처음 6시즌 동안, 그는 모두 20골 이상을 기록했고, 피치치를 4번이나 수상했습니다. 또한, 그는 레알 마드리드가 1961년부터 1965년까지 5년 연속 라리가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유러피언컵에서는 39경기에 출전하여 35골을 기록했습니다. 푸스카스는 30이 넘은 나이에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했지만, 그곳에서 전설적인 선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8시즌 동안 3번의 유로피언컵 우승, 5번의 리그 우승, 1번의 코파 델레이 우승, 1번의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또한, 그는 4번의 라리가 득점왕, 2번의 유로피언컵 득점왕을 차지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는 동안, 그는 총 262경기에 출전하여 242골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단연 강력한 왼발 슛이었습니다. 슛은 물론이고 패스, 개인기까지 모두 왼발로만 구사했기 때문에 별명이 악마의 왼발이었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29세 이전에 85경기에서 84골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1954 FIFA 스위스 월드컵에서 맞붙었던 대한민국의 홍덕영 골키퍼에 따르면, 푸스카스의 슈팅은 너무 강력해서 펀칭을 하면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을 주었고, 골대에 공이 맞으면 한참 동안 흔들렸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문제점 역시 왼발을 고집 하는 것이었는데, 오른발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각도를 바꿔가며 굳이 왼발로 차려는 시도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골을 놓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푸스카스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으니 푸스카스의 왼발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요한 크루이프가 토탈 풋볼을 잘 이행해낸 것처럼, 푸스카스 역시도 '소셜리스트 풋볼' 정립에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헝가리 혁명이 없었다면 축구 강국은 브라질이 아닌 헝가리였을 수도 있었습니다. 월드컵 결승에는 정말 많은 비극과 기적이 있었지만, 푸스카스에게 있어서 최악의 비극은 당연히 '베른의 비극'이었고, 또한 스페인으로 귀화했을 때는 운이 없게도 4경기밖에 못 뛰고 다시 한번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어야 했습니다. 

사후의 업적

2000년부터 알츠하이머를 앓았던 푸스카스는 2006년 11월 17일에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국장에서 관은 군례를 위해 푸슈카시 페렌츠 슈터디온에서 회쇠크 광장으로 옮겨졌고, 2006년 12월 9일에 센트이슈트반 대성당에 안장되었습니다. 푸스카스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함께 역대 최초의 월드 스타로 였으며, 유럽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선수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부다페스트 혼베드와 레알마드리드에서 통산 746골을 기록했으며, 2009년에는 올해의 골 상의 이름을 푸스카스상으로 변경해서 발롱도르와 함께 수상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보면 축구사의 푸스카스가 남긴 발자취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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