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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 이야기

파울리누 알칸타라 (Paulino Alcántara) 역사를 바꾼 선수

by WILDCATS 2023. 9. 20.

El Rompe Redes, 그물 파괴자

파울리노 알칸타라 리에스트라(Paulino Alcántara Riestrá, 1896년 10월 7일 ~ 1964년 2월 13일)는 필리핀에서 태어난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선수시절 포워드로 활약했습니다.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냈으며, 카탈루냐, 필리핀, 스페인에서 국가대표로도 활약했습니다. 15세의 나이로 FC 바르셀로나((Futbol Club Barcelona))에서 데뷔한 알칸타라는 최연소 득점과 역대 최다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공식 및 친선 경기 399경기에서 395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87년 동안 유지된 클럽 기록입니다. 1927년 31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의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알칸타라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클럽 감독을 역임 했습니다. 1951년 알칸타라는 코치가 되어 세 번의 스페인 대표팀 감독을 맡았습니다.

 

파울리노 알칸타라는 1896년 10월 7일 필리핀 일로일로주 콘셉시온에서 스페인 군인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세 살 때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이주했습니다. 그 해에 호안 감퍼(Joan Gamper)가 FC 바르셀로나를 창단했는데 알칸타라는 감퍼의 눈에 띄기 전까지 FC 갈레노에서 뛰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에 합류했습니다. 1912년 2월 25일 15세 4개월 18일의 나이로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Catalan football championship)에서 카탈 SC(Catalá SC)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바르셀로나는 이 경기에서 9-0으로 승리했고, 알칸타라는 경기의 첫 세 골을 넣으며 FC 바르셀로나 공식 경기에서 최연소 득점 기록을 세웠습니다.

 

Paulino Alcántara

 

클럽 시절 알칸타라의 팀 동료로는 프란시스코 브루 산즈, 잭 그린웰, 로마 포르스 등이 있었습니다. 알칸타라는 클럽이 1913년과 1916년에 두 번의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와 1913년 코파 델 레이(Campeonato de España–Copa de Su Majestad el Rey)에서 우승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그는 레알 소시에다드(Real Sociedad de Fútbol, S.A.D.)와 2-2로 무승부로 끝난 결승전을 놓쳤지만 바르셀로나가 2-1로 승리하면서 재연에서 뛰었습니다. 1913년 코파 델 레(Campeonato de España–Copa de Su Majestad el Rey) 결승전은 바르셀로나와 레알 소시에다드가 붙었는데, 두 팀은 2-2로 비겼다가 재경기에서 바르셀로나가 2-1로 승리해 우승을 차지 합니다.

1916년 알칸타라의 부모는 아들을 필리핀에서 공부하기를 권유하며 아들과 함께 필리핀으로갑 니다. 알칸타라는 부모님이 원하는 의학 공부를 하면서도 필리핀의 보헤미안 스포츠 클럽에 가입해 축구 선수의 생활도 이어 갔습니다. 그는 클럽이 1917년과 1918년 필리핀 챔피언십에서 두 번 우승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17년에는 필리핀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도쿄에서 열린 극동 챔피언십 대회에 참가 하게 됐는데, 홈팀 일본을 상대로 15-2라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을 세우며 대승을 하게 됩니다. 이는 아직까지도 필리핀의 국제 경기에서 최다 점수차 승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칸타라의 부재로 바르셀로나는 성적 하락을 면치 못못했는데. 구단은 알카트라의 부모를 직접 만나 스페인으로 복귀를 호소 했습니다. 그런데 알칸타라는 1917년에 말라리아에 걸리게 되면서 바르셀로나의 염원은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바르셀로나로의 귀환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알칸타라는 전 팀 동료이자 감독인 잭 그린웰의 실험적인 전략으로 수비수로 잠시 기용되었지만, 곧 공격수로 다시 복귀 합니다. 그리고 1919년 클럽의 또 다른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우승에 기여하게 됩니다.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는 아레나스 클럽 데 게쏘(Arenas Club de Getxo)의 펠릭스 세수마가(Félix Sesúmaga)에게 해트트릭을 내주며 2-5로 패했습니다. 1919년 4월 13일 레 코르트에서 열린 레알 소시에다드와의 경기에서 알칸타라는 강력한 슈팅을 경찰이 방해해 공과 경찰이 모두 골대 뒤편으로 들어가는 '경찰 골'을 기록하는 해프닝이 일어났습니다.

 

1920년, 클럽은 코파 델 레이와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에서 우승했고, 알칸타라는 컵 결승에서 아틀레틱 빌바오(Athletic Bilbao B)를 상대로 2-0으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팀에는 알칸타라와 파트너십을 맺은 에밀리오 사기 리냥(Emilio Sagi Liñán)을 비롯해 리카르도 자모라(Ricardo Zamora), 호셉 사미티에(Josep Samitier), 펠릭스 세수마가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로써 클럽 최초의 황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알칸타라는 바르셀로나가 레알 우니온(Real Unión Club de Irún, S.A.D.)을 5-1로 이기는 1922년 컵 결승전에서도 두 골을 넣었고, 1926년 결승전에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Club Atlético de Madrid, S.A.D.)에게 3-2로 승리하는데 결승골을 넣습니다.

 

국제 경기 경력

알칸타라는 당시 많은 FC 바르셀로나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카탈루니아 국가 대표팀에 소집되어 데뷔했습니다. 그는 1915년 5월, 아스투리아스 왕자컵(Prince of Asturias Cup)에 참가한 카탈루냐 팀의 일원이 됩니다. 개막전에서 대회 사상 첫 골을 넣었지만, 다음 경기에서 패해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알칸타라는 1926년 아스투리아스 왕자컵 마지막 대회에서도 카탈루냐를 대표해 출전했습니다.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카탈루냐가 아스투리아스 왕자컵에서 세 번째 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알칸타라는 1920년에 스페인 대표팀에 선발되었지만 건강에 이상에 생겨 집에 머물게 됩니다. 그가 없는 스페인은 8강에서 벨기에에 패하게 됩니다. 알칸타라는 1921년 10월 7일 25세의 나이로 스페인 데뷔전을 치렀고, 2골을 넣으며 승리했습니다. 1922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골을 넣은 후 부터 '엘 롬페 레데스' 또는 '트렌카삭스'(그물 파괴자)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1921년부터 1927년까지 스페인 대표팀으로 총 5경기에 출전해 6골을 넣으며 당시 스페인 국가대표 팀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은퇴

알칸타라는 1927년 7월 3일, 31세의 나이로 부모님들이 원했던 의사가 되기 위해 은퇴를 결심 합니다. 같은 날, FC 바르셀로나는 그의 은퇴를 기리는 평가전에서 스페인 올스타와 경기를 치루게 됩니다. 은퇴 이후에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클럽 감독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수 시절을 회고록으로 쓴 최초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입니다. 1951년, 알칸타라는 펠릭스 퀘사다(Félix Quesada), 루이스 이세타(Luís Iceta)와 함께 스위스, 벨기에, 스웨덴과의 세 경기에 스페인 대표팀 감독으로 선발 되기도 했습니다.

 

87년 뒤 리오넬 메시에게서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 알칸타라는 FC 바르셀로나에서 399경기 395골로서 바르셀로나의 최대 득점자로 기록 되고 있었습니다. 알칸타라의 고국인 필리핀에서는 2010년대까지만 해도 축구 인기가 낮았기 때문에 알칸타라의 인지도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필리핀에서 축구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알칸타라의 인지도도 높아졌습니다. 2018년에는 필리핀 풋볼 리그의 국내 컵 토너먼트인 코파 파울리노 알칸타라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또한 2021년에는 필리핀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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