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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 이야기

라슬로 쿠발라 (Kubala Stecz László) 역사를 바꾼 선수

by WILDCATS 2023. 9. 20.

가난한 가정에서 꽃피운 축구 천재

1927년 6월 10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쿠발라는 가난한 가정에서도 축구에 대한 열정을 키웠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슬라브 출신 이민자로 일용직 미장이였고, 어머니는 마분지 공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였습니다. 쿠발라에게 공을 사줄 형편이 안됐던 부모는 마분지, 넝마, 종이 등으로 장난감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친 장난감 공으로 공놀이를 하면서 쿠발라는 뛰어난 감각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공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보다 더 많았고, "공 차는 소년"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거리에서 멋진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1939년, 11세의 어린 나이에 헝가리 하부 리그 팀 간츠 TE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도 작은 체구였지만 뛰어난 실력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쿠발라는 축구를 이어갔습니다. 1944년에는 간츠 TE에서 프로로 데뷔했고, 1945년에는 페렌츠바로시(Ferencvárosi Torna Club)로 이적하여 49경기에서 27골을 기록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페렌츠바로시에서 활약을 인정받아 1946년에는 슬로반 브라티슬라바(Športový klub Slovan Bratislava futbal, a.s.)로 이적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페르디난트 다우치크(Ferdinand Daučík) 감독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다우치크 감독과의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쿠발라는 활약을 이어갔고, 19세의 나이에 체코슬로바키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습니다. 또한, 다우치크 감독의 여동생인 안나 비올라 다우치코바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다우치크와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공산주의의 억압을 벗어나다

라슬로 쿠발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활약하던 쿠발라는 1948년, 고국 헝가리의 버셔시 SC(Vasas Sports Club)로 이적했습니다. 축구 스타가 된 그는 거리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옷을 나누어주며 경기장 안팎에서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쿠발라는 어린 시절부터 돈보다 중요한 가치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을 벌고 나서도 부모와 친지들을 돕는 데 앞장섰으며, 이웃들에게도 돈을 나누어주었습니다.

 

헝가리가 공산당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쿠발라는 자유롭게 축구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49년, 동료 4명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탈출하여 인스브루크의 프로 파트리아(Aurora Pro Patria 1919 S.r.l.)와 계약을 했습니다. 하지만 헝가리 축구 협회가 이적 동의서를 내주지 않아 FIFA로부터 이적 승인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쿠발라가 헝가리 공산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국가를 떠났으며, 병역 의무와 징집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쿠발라는 프로 파트리아에서 친선 경기만 뛰게 되었습니다. 쿠발라는 당시 AS 로마의 감독이었던 매형 다우치크와 다시 만나 1950년 1월, 헝가리 망명자들을 모아 '헝가리아'라는 팀을 만들었습니다. 쿠발라도 이 팀에 합류했습니다. 1950년 여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헝가리아의 투어는 쿠발라의 인생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1950년 여름, 쿠발라가 이끄는 헝가리아 망명팀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친선 경기를 치렀습니다. 6월 5일 에스파뇰(Reial Club Deportiu Espanyol de Barcelona, S.A.D.)과의 경기에서 쿠발라는 4골을 몰아치며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관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레알 마드리드는 쿠발라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다우치크 감독의 영입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해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이에 바르셀로나가 나서 다우치크 감독의 영입을 승낙하고, 쿠발라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950년 1월 15일, 쿠발라는 다우치크 감독과 함께 바르셀로나에 입단했습니다. 그러나 FIFA의 이적 승인이 나지 않아 쿠발라는 바르셀로나에서 1년 동안 친선 경기만 뛸 수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단장이었던 라이문도 사포르타가 나서 쿠발라에게 스페인 국적을 부여했습니다. 마침내 1951년 1월 15일, 쿠발라는 바르셀로나에서 공식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1951년 6월 1일, 쿠발라는 스페인 국적을 얻어 스페인 축구계에 정식 데뷔했습니다. 그는 1951년 코파 델 레이 준결승에서 6골을 몰아치며 주목을 받았고, 1951/52 시즌에는 19경기에 출전하여 26골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엘 클라시코에서는 4-2로 승리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1952년 2월 10일에는 9-0으로 승리한 스포르팅 히혼(Real Sporting de Gijón, S.A.D.)전에서 7골을 넣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쿠발라의 활약에 힘입어 바르셀로나는 리그 5회 우승, 코파 델 레이 우승, 라틴컵 우승, 코파 에바 두아르테 우승 등 총 5개의 트로피를 획득했습니다. 쿠발라는 한 시즌에 5개의 트로피를 획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으며, 바르셀로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즌 중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바르셀로나 레전드의 빛과 그림자

쿠발라는 1952-53 시즌에 폐결핵 진단을 받아 경기에 결장했습니다. 하지만 리그 막판에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팀의 연속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또한 코파 델 레이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쳐 대회 3연속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다만, 이번 시즌에는 엘 클라시코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는 병석에 누워 출전하지 못했고, 바르셀로나 안방 리턴 매치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의 올리바와 충돌하여 퇴장당했습니다.

 

쿠발라는 바르사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지만, 엘 클라시코에서는 골을 많이 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Alfredo Stéfano Di Stéfano Laulhé)의 경쟁을 통해 엘 클라시코의 흥행과 재미를 주도했습니다. 그는 1957-58 시즌에는 산도르 코츠시스(Kocsis Sándor)와 졸탄 치보르(Czibor Zoltán)의 영입을 주도하여, 루이스 수아레스(Luis Suárez)와 에바리스투와 함께 강력한 공격진을 구성하여 유럽 무대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맞설 만한 전력을 갖추었습니다. 1958-59 시즌에는 라리가, 코파 델 레이, 인터시티 페어스컵을 모두 우승했지만, 1959-60 시즌에는 감독과의 갈등으로 출전이 제한되었습니다. 결국 1960-61 시즌에 유로피언 컵 16강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재회했고,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SL 벤피카(Sport Lisboa e Benfica)에 패하여 유로피언 컵 우승을 놓쳤습니다. 쿠팔라는 그 해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1961년 바르사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유스팀 감독으로 부임했고, 11월에 루이스 미로 감독이 해임되자 1군 감독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62/63 시즌 동안 감독으로 활동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결국 쿠발라는 그 해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 츠르베나 즈베즈다((Fudbalski Klub Crvena Zvezda Beograd))에 패하여 무관에 그치자 곧 이어 사임했습니다.

RCD 에스파뇰, FC 취리히(Fussballclub Zürich), 토론토 팰컨스(Toronto Falcons), 코르도바(Córdoba Club de Fútbol, S.A.D.)를 거쳐 1969년부터 11년간 스페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1980 유로에 각각 본선 진출을 이끌었습니다. 1980년에는 바르사로 돌아왔으나, 한 시즌 만에 조기 경질되었습니다.

 

이후 알 힐랄(Al Hilal Saudi Football Club), 레알 무르시아Real Murcia Club de Fútbol, S.A.D.), CD 말라가(Málaga Club de Fútbol, S.A.D.)를 거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스페인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아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1995년 파라과이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마지막으로 은퇴했고, 1990년부터 9년간 바르사 전직 선수 조합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쿠발라는 2002년 5월 17일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위대한 선수

헝가리 출신의 스트라이커 쿠발라(Kubala Stecz László)는 1950년대 FC 바르셀로나(Futbol Club Barcelona)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라리가(LaLiga)에서 4번의 우승을 차지했고, 유럽컵 5연패를 달성한 레알 마드리드(Real Madrid Club de Fútbol)와의 라이벌전을 펼쳤습니다. 1999년에는 바르셀로나 팬들이 클럽 역대 최고의 선수로 그를 선정했습니다. 이후 리오넬 메시(Lionel Messi, 2004-2021)차비 에르난데스(Xavi Hernandez, 1998-2015)가 그 보다 더 높은 곳에 서게 됩니다.

 

 

 

축구 역사 이야기 ① 산티아고 전투 (Battle of Santi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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