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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 이야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Alfredo Di Stéfano) 역사를 바꾼 선수

by WILDCATS 2023. 9. 21.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Alfredo Di Stéfano)는 스페인 국적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레알 마드리드 CF(Real Madrid Club de Fútbol)의 명예 회장입니다.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와 함께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디 스테파노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에서 활약했으며, 1955년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한 이후 1966년까지 활동했는데 그의 활약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당대 최고의 팀으로 자리매김하며 "저승사자 군단"이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의 명문 구단 CA 리버 플레이트(Club Atlético River Plate)에서 19살의 나이에 데뷔하여, 약 10년 동안 남미 리그에서 활약했습니다.1947년에는 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1948년에는 리그 2위로 마감했지만, 남아메리카 클럽 챔피언십에서 4골을 기록하며 준우승에 기여했습니다.1949년에는 콜롬비아의 CD 로스 미요나리오스(Millonarios FC)로 이적하여 4시즌 동안 3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경험했습니다. 두 차례 득점왕에 올랐으며, 총 292경기에서 267골을 기록했습니다.

 

Alfredo Di Stéfano

 

디 스테파노는 남미에서 66경기에 49골, 25경기에 10골, 101경기에 90골을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1952년 3월 31일, 미요나리오스는 마드리드에서 열린 레알 마드리드와 CF(Real Madrid Club de Fútbol)의 원정 경기에서 4-2로 승리했는데, 이 경기에서 디 스테파노는 멀티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이 경기를 통해 미요나리오스는 스페인 언론으로부터 세계 최강 팀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디 스테파노는 원래 CA 리버 플레이트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당시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 악화로 인해 월급을 지급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디 스테파노는 리버 플레이트를 떠나 콜롬비아의 CD 로스 미요나리오스로 이적하게 되었습니다. 미요나리오스는 경제 성장과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영입하며 콜롬비아 리그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콜롬비아 리그는 이후 급하게 형성된 탓에 급격하게 몰락하기 시작했는데, 1950년대 초반 콜롬비아 경제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미요나리오스는 유럽 투어로 돈을 벌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지만 결국 스테파노는 콜롬비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미요나리오스는 스페인에서 투어 경기를 펼쳤고, 스테파노의 활약은 바르셀로나(Fútbol Club Barcelona)와 레알 마드리드 모두의 관심을 끌게됩니다.

 

당시 스페인 리그는 라슬로 쿠발라를 앞세운 바르셀로나가 독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디 스테파노의 영입은 리그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미요나리오스의 경쟁 상대인 '산타 페'의 임원이었던 후안 부스케츠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와의 협상을 거의 하지 않고, 로스 미요나리오스에게 통보 없이 디 스테파노를 스페인으로 데려와 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당연히 미요나리오스를 분노하게 했습니다. 결국 미요나리오스와 바르셀로나 간의 협상은 진행되지 못하게됩니다. 바르셀로나는 리버 플레이트와 대결을 벌였고, 디 스테파노는 유럽으로 떠나고 싶었던 마음에 무작정 스페인으로 날아갔습니다.

 

결국 바르셀로나와 로스 미요나리오스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협상의 방해물이 등장했습니다. 그 주범은 바르셀로나 회장인 엔리크 마르티 카레토였는데, 카레토는 디 스테파노 이적에 필요한 자금을 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외부 압박이 있었던 것인지 의심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한편, 레알 마드리드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협상을 통해 이적 동의를 받아냈습니다. 결국 디 스테파노는 이중 계약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스페인 축구 협회와 정부, 리버 플레이트와 로스 미요나리오스, 그리고 FIFA와 콜롬비아 축구 협회까지 모두 관여하게 되면서 논란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여기에 더해 디 스테파노라는 선수의 플레이마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디 스테파노가 레알 마드리드와 비밀 협정을 맺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지만, 바르셀로나 팬들 사이에서는 디 스테파노를 쿠발라와 비교하며 그의 필요성에 대한 불만이 나타났습니다. 결국 국제적인 판단이 내려지게 되었는데,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는 바르셀로나의 권한을 인정하고 FIFA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허락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전 결정을 파기하고 모든 책임을 스페인 축구 협회에 떠넘겼습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이 6개월 동안 계속되자,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협상을 통해 디 스테파노의 유벤투스 이적에 합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민 스포츠 당과 스페인 축구 협회는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이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에서 뛰며 국가 대표로 활약한 후 로스 미요나리오스에서 콜롬비아 국적을 취득하여 콜롬비아 국가 대표로 활동한 세계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국적 이동과 대표팀 출장이 가능한 시절이었습니다. 따라서 월드컵에서 좋은 선수를 지키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뛰던 시절의 아르헨티나도 이러한 행동을 했고, 결국 콜롬비아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스테파노가 유벤투스(Juventus Football Club) 선수가 된다면, 스페인 국가 대표 스트라이커를 이탈리아로 내주게 되는 셈입니다. 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자, 결국 스페인 축구 협회는 스테파노의 소유권을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4년 동안 공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양 팀은 매년 한 시즌씩 스테파노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협정은 바르셀로나 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팬들은 이 협정을 프랑코 정권의 계획으로 보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모욕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스테파노의 활약 역시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푸스카스와 함께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

한바탕 소동 끝에 레알 마드리드에서만 뛰게 된 스테파노는 데뷔 시즌부터 29골을 넣으며 피치치를 차지하고 바르셀로나의 3연패를 저지했습니다. 디 스테파노 영입에 힘입어 레알 마드리드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Santiago Bernabéu) 회장의 주도 아래 프란시스코 헨토(Francisco Gento Lopez), 레몽 코파(Raymond Kopa), 호세 산타마리아(José Santamaría), 페렌츠 푸스카스(Puskás Ferenc) 등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하며 '저승사자 군단'을 결성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는데, 왼쪽 윙 프란시스코 헨토는 스페인 최고의 드리블러로 프랑코 대통령의 최애 선수였고, 레몽 코파는 1958년 발롱도르 수상자였습니다.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의 악마의 조합을 앞세운 레알 마드리드는 라리가 우승을 8번 차지했습니다. 디 스테파노는 이 기간 동안 피치치 5번, 발롱도르 2번을 수상하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MVP 4번은 부수적인 업적에 불과했습니다. 1964년까지 마드리드에서 모든 영광을 함께한 후, 선수 생활의 황혼기가 찾아왔을 때 37세의 나이로 RCD 에스파뇰(Reial Club Deportiu Espanyol de Barcelona)로 이적했습니다. 말년에도 47경기에서 11골을 기록하는 등 훌륭한 활약을 펼쳤으며, 영광스러운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테파노가 바르셀로나의 지역 라이벌인 에스파뇰로 이적했기 때문에 바르셀로나에 대한 감정이 나빴다는 추측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파뇰에서는 라리가 초기에 라이벌이자 잠깐 팀 동료였던 라슬로 쿠발라(Kubala Stecz László)와 재회했습니다. 또한, 에스파뇰은 바르셀로나 쪽 인사들에 의해 카탈루냐 축구 협회의 지원으로 후원되었는데, 이에 따라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라이벌 구도는 카탈루냐와 카스티야의 민족적 대립 문제라는 이야기가 현대에 와서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마르카는 2007-08 시즌부터 디 스테파노를 기리고자 시즌 최우수 선수에게 '트로페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라는 이름의 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최초 수상자는 라울 곤살레스이며 가장 많이 수상한 선수는 리오넬 메시입니다.

완벽의 화신, 디 스테파노

디 스테파노는 강력하고 빠르며 기술적으로 뛰어나며 다재다능한 선수였습니다. 그는 경기장 어디에서나 뛸 수 있는 체력, 전술적 다양성, 창의성, 시야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플레이를 보여 줬습니다. 90분 동안 끊임없이 역동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디 스테파노는 금빛 화살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부드러우면서도 빠른 볼 콘트롤을 갖고 있었습니다. 공격, 미드필드, 수비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선수였으며, 모든 포지션에서 최고 수준의 기량을 발휘했습니다. 당시에는 큰 편에 속했던 178cm의 장신이었으며, 축구 황제 펠레(Pelé), 에우제비우(Eusébio),마라도나(Diego Maradona) 등에게서 역대 최고라고 인정받는 선수였습니다.

 

Alfredo Di Stéfano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근대 축구를 정립한 선수로 평가받습니다. 현대 토탈 풋볼의 키워드 중 하나인 포지션 파괴를 1950년대에 이미 보여준 선구자입니다. 스테파노가 있는 팀은 포지션 당 2명의 선수가 있는 것처럼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 그라운드를 커버하며 뛰어다니는 선수였습니다. 이러한 범용성 때문에 그는 완전함이라는 단어와 함께 언급됩니다. 디 스테파노의 주 포지션을 하나로 단정짓기는 어려운데, 당대 축구의 특성상 그에게도 공격수가 최고의 포지션이긴 했지만, 미드필더로서도 많은 경기를 소화했기 때문이다. 스테파노의 평가는 현재의 펠레, 마라도나와 함께 역대 최고의 선수로 분류되고 있는데 가장 앞 세대의 선수로서 경기력에 대한 자료 및 실제 경기를 본 사람이 거의 없고,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부족한 불운한 국가대표 경력으로 인해 현재 그의 인지도는 다른 역대급 선수들에 비해 낮을 수 있습니다.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이 1955년 부터 시작되었는데,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Puskás Ferenc)가 이끄는 저승사자 군단은 유로피언컵 5연패를 이루어 냈습니다. 1959-60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상대해 5년간 결승전에서만 5경기 7골을 넣었으며, 5년 연속 득점왕 2회에 빛나는 활약을 했습니다. 그는 발롱도르 2회 수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유러피언 컵 통산 58경기 49골로, 후에 라울 곤살레스가 기록을 깨기 전까지는 수십 년간 최다 골 기록했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2014년 7월 7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사망합니다.

디 스테파노, 근대 축구의 선구자

경기당 평균 0.84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리오넬 메시(Lionel Andrés Messi)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보다도 높은 숫자입니다. 또한, 1960년 4월 21일에 열린 유러피언컵 준결승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의 유럽 대회 100호 골을 넣었는데, 상대는 바르셀로나였습니다. 게다가 당시로서 27세라는 늦은 나이에 시작해서 30대에 챔피언스 리그 5연패로 전성기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30을 넘으면 슬슬 나이 걱정을 해야 하는데, 더욱이 50년대 선수였으며, 당시 유러피언컵과 현재 UEFA 챔피언스 리그가 현재 클럽 축구계에서 최고 대회의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고려하면, 대회 초기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라는 슈퍼 스타의 놀라운 업적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됩니다.그런 이유로 현대 클럽 축구의 아버지라고 평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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